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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사 이태연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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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덕사 이태연 묘비는 조선 시대 문신인 이덕사(1582~1636)와 그의 아들 이태연(1615~1669)의 묘에 세워진 비석이다. 이덕사 묘비는 사위인 송시열이 1666년에 작성했으며, 이태연 묘비는 1725년에 건립되었다. 두 묘비 모두 사료적 가치가 높으며, 특히 이태연은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며 지역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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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사 이태연 묘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문화재 정보
이름이덕사 이태연 묘비
로마자 표기Ideoksa Itaeyeon Myobi
국가대한민국
위치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평기리 산42-13
유형향토문화유산
지정 번호52
지정일2014년 9월 30일
문화재 정보 (공주시)
이름 (공주시)이덕사·이태연 묘비
유형 (공주시)향토문화유적(기념물)
번호 (공주시)9
지정일 (공주시)1997년 6월 5일
해제일 (공주시)2014년 9월 30일

2. 이덕사 묘비


이덕사 이태연 묘비(李德泗 李泰淵 墓碑)는 조선 시대 문신인 이덕사(李德泗, 1582~1636)와 이태연(李泰淵, 1615~1669) 부자(父子)의 무덤에 세워져 있는 비석이다. 이덕사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응로(應魯)이다.

이덕사의 묘비는 1666년(현종 7) 사위인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묘비 앞면에는 '有明 朝鮮 義禁府都事 贈吏曹參判 李公德泗之墓(유명 조선 의금부도사 증이조참판 이공덕사지묘)'라고 새겨져 있다.[2]

2. 1. 생애

이덕사(李德泗, 1582~1636)는 조선 시대의 문신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字)는 응로(應魯)이다. 1616년(광해군 8) 증광시에서 생원에 합격하였고, 의금부 도사(都事)를 지냈다. 송시열(1607~1689)의 장인으로, 송시열의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가 이덕사의 딸이다.[2]

1666년(현종 7)에 세워진 묘비는 사위인 송시열이 작성하고 글씨를 썼다. 높이 144cm, 폭 67cm, 두께 25cm이다. 묘비 앞면에는 '有明 朝鮮 義禁府都事 贈吏曹參判 李公德泗之墓(유명 조선 의금부도사 증이조참판 이공덕사지묘)'라 새겨져 있어, 사후 이조참판(종이품)에 추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뒷면에는 이덕사의 행적과 송시열의 감회가 기록되어 있다.[2]

2. 2. 묘비 건립 및 특징

1666년(현종 7)에 이덕사의 사위인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묘비 크기는 높이 144cm, 폭 67cm, 두께 25cm이다. 묘비 앞면에는 '有明 朝鮮 義禁府都事 贈吏曹參判 李公德泗之墓(유명 조선 의금부도사 증이조참판 이공덕사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이덕사가 죽은 후에 종이품(從二品) 관직인 이조참판(吏曹參判)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묘비 뒷면에는 이덕사의 행적과 송시열의 감회가 기록되어 있다.[2]

3. 이태연 묘비

이태연(1615~1669)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정숙(靜叔), 호는 눌재(訥齋)이다. 1725년(영조 1)에 이태연의 무덤 오른쪽에 묘비가 세워졌다.

3. 1. 생애

눌재(訥齋) 이태연(李泰淵, 1615~1669)은 14세 때부터 서울에서 유학하며 신동으로 불렸다.[2] 1635년(인조 13) 증광시 진사에 합격했으나,[2] 이듬해인 1636년 아버지 이덕사가 사망하여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고 학업에 정진했다. 1642년(인조 20) 문과 정시에 을과 1위로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했다.

충청도와 전라도 관찰사, 병조참의를 거쳐 승지를 역임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후 사간원의 최고 관직인 정삼품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1668년(현종 9) 이조참의로 자리를 옮겼다가 평안도 관찰사가 공석이 되자 추천을 받아 종이품 가선대부로 품계를 올려 평안도 관찰사 겸 평양부윤으로 임명되었다.

이태연은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이후 어려워진 평안도 지역의 군기를 다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관서지방(평안도)의 인재 등용을 요청하고, 을지문덕을 기리는 사당을 건립하는 등 지역 발전을 위해 힘쓰던 중 사망했다.

1650년(효종 1년) 낙당 김자점 일파로부터 탄핵받아 파직되었다가,[2] 1652년 당진현감으로 등용되었다. 1659년에는 충청도 관찰사 재직 중 유배 죄인 7명을 임의로 풀어주어 다시 파직되었으나,[2] 이듬해 경주 부윤으로 복직되었다.

3. 2. 묘비 건립 및 특징

이태연의 묘비는 1725년(영조 1)에 건립되었으며, 크기는 높이 163cm, 너비 69cm, 두께 29cm이다. 묘비 앞면에는 '有明 朝鮮 平安道觀察使 李公泰淵之墓|유명 조선 평안도관찰사 이공태연지묘중국어'라고 새겨져 있다. 옆면과 뒷면에는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1641~1721)가 지은 이태연의 행적이 남아있다.[2]

4. 평가 및 의의

이덕사와 이태연 부자는 조선 중기 관료였다. 특히 이태연은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지방관으로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자 노력하였다. 이덕사 묘비는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송시열이 직접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는 점에서, 이태연 묘비는 송시열 학파의 학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1]

참조

[1] 고시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지정 고시 세종특별자치시장 2014-09-30
[2] 안내문 현지 안내문 공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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